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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겨울 풍랑 뚫고 ‘편안하게, 천천히’ … 1200명 타는 배, 울릉의 설경 열다

작성일
2024.02.20 10:47
등록자
울릉_관리자
조회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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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일기자의 여행 - 눈 많기로 유명한 2월… 젊어지는 울릉도

# 울릉도의 겨울을 여행한다는 것

겨울, 울릉도에 가서 이런 것들을 보고 왔다. 으르렁거리며 기암의 해안도로를 삼킬 듯 넘실거리는 집채만 한 파도, 폭설로 세상의 경계가 아득해진 나리분지, 해안가에서 몸을 세우지 못할 정도로 몰아치는 거친 바람, 푸른 날이 선 칼 같은 형상으로 솟은 바위, 화선지에 진한 먹을 찍어 그린 것 같은 산…. 겨울 울릉도의 경관은 비장하고도 장엄했다.

울릉도 겨울 여행은 그동안 불가능에 가까웠다. 멀기도 하거니와 뱃길도 험해 겨울이면 배가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멀쩡하던 바다가 갑자기 거칠어지면 꼼짝없이 섬 안에서 발이 묶이곤 했다. 폭풍주의보와 높은 파고로 일주일씩 갇히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래서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들은, 11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를 ‘비운항 기간’으로 정하고 아예 운항을 중단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겨울에 섬 주민마저 육지로 나왔을까. 겨울이면 도동과 저동의 식당과 가게 중 태반이 ‘육지 출타 중’이란 종이 한 장 써 붙이고 문을 닫았다. 지독한 멀미, 혹은 뜻밖의 고립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었으니 여행자들은 좀처럼 울릉도의 겨울을 볼 수 없었다. 해안을 덮치는 높은 겨울 파도도, 나리분지의 기록적인 폭설도 그저 전설처럼 전해 들은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배 두 척이 연이어 울릉도 항로에 취항하면서 접근성이 확 달라진 거다. 두 척의 배가 울릉도 여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는 얘기다. 한 척의 배가 ‘국내에서 가장 크고 편안한 배’였다면, 다른 한 척의 배는 ‘가장 빠른 배’다.

본격적인 배 얘기 전에 질문 먼저. 울릉도 여행의 접근성을 높이려면, 과연 어떤 교통수단을 투입해야 했을까. 빠른 배? 아니면 편안한 배? 여행자들은 울릉도를 빨리 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편안하게 가고 싶었을까. 당연히 ‘빠른 배’일 거라 생각했는데, 틀렸다. 울릉도 여행을 바꾼 건 빠른 배가 아니라 ‘느리지만 크고 편안한 배’였다.


# 느린 배가 울릉도를 바꿔 놓다

2021년 9월 16일. 대형 카페리 ‘뉴씨다오펄(新石島明珠)’호가 포항 영일만~울릉 사동항 구간 운항을 시작했다. 한 번에 1200명이 타는 1만9988t급 배다. 배는 2017년에 진수된 중고인 데다 시속 20.5노트로 느리다. 본래 군산항에서 중국 웨이하이(威海)시 스다오(石島)항까지 국제노선을 운항하던 중국해운회사 배였는데, 코로나19로 운항이 전면 중단돼 정박한 채 녹슬어 가던 것을, 울릉도에서 호박엿공장으로 돈을 번 울릉도 출신 사업가가 빌려와서 포항~울릉도 구간에 투입한 것이다.

뉴씨다오펄의 울릉도 취항이 혁신이었던 건 엄청난 ‘덩치’ 때문이었다. 2만t에 육박하는 9층짜리 거대한 배는 웬만한 파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울릉도를 오가는 배들은 파고가 높거나 바람이 불면 밥 먹듯 결항했다. 연간 결항 일수가 100일가량 됐다. 사흘에 한 번꼴로 발이 묶인 셈이었다. 한번 갇히면 언제 뱃길이 풀릴지 기약도 없었다. 그런데 뉴씨다오펄은 웬만한 풍랑에도 출항했다. 풍랑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바다 위를 늠름하게 항해했다. 파도로 인한 배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주는 첨단 스태빌라이저 장치 덕분에 멀미도 크게 줄었다.

뉴씨다오펄은 1박 2일이 소요되는 국제항로에 취항하던 선박이니만큼 모든 좌석이 침대, 혹은 침상이다. 2인실과 4인실, 6인실은 침대가 있고, 8인실과 10인실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이불을 덮는다. 배의 항해속력은 시속 38㎞. 돌아올 배편의 운항시간은 낮이지만, 갈 때는 포항에서 자정 무렵 타서 울릉도에 오전 6시 30분쯤 내린다. ‘자면서’ 가는 느린 뱃길이 얼마나 안락한지는 경험해보면 안다.

큰 배는 보통 페리와 크루즈로 구분한다. 페리는 교통수단으로써의 배를 뜻하는 여객선이고, 크루즈는 다양한 부대시설을 두고 선실을 호텔로 쓰는 유람선을 말한다. 식당도, 매점도, 노래방도, 카페도 있긴 하지만 이런 구분법에 따르면 뉴씨다오펄은 명백하게 페리다. 선사도 페리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내심 ‘사실상의 크루즈’라 주장하고 싶은 듯하다. 선사 이름을 ‘울릉크루즈’로 지은 것에서 그런 마음이 읽힌다.

선사가 내세우는 구호는 ‘2만t급 카페리로 열어가는 울릉크루즈’다. 앞뒤가 안 맞는다. ‘카페리’로 ‘크루즈’를 열어가다니…. 하지만 배를 한 번 타보면 이런 어정쩡한 구호가 이해된다. 크루즈라기에는 모자란 게 많지만, 그렇다고 그냥 ‘페리’라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한 게 많을 듯해서다.

# 겨울, 울릉도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뉴씨다오펄호 운항이 바꿔놓은 건 두 가지. 하나는 울릉도 겨울 여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달라지겠지만, 아직 울릉도는 자주 가게 되는 여행지는 아니다. 일생에 한 번, 많아도 두세 번이나 될까. 딱 한 번 울릉도에 갈 기회가 있다면 봄이나 여름을 추천한다. 가을 울릉도도 나무랄 데 없다. 그런데 한 번 더 가게 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겨울이다.

기사전문 : 문화일보(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021501032412048001)